안녕하세요:) 추미애 국회의원 프로필 학력 나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추미애 국회의원의 프로필로는 1958년 10월 23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에서 출생하였으며, 2019년 나이는 62세입니다.
추매애 국회의원은 1974년 구남여자중학교를 졸업,1977년 경북여자고등학교를 졸업
1981년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학사,1983년 한양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과정을 수료,2001년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경제학 석사를 수료하였습니다.
추미애 국회의원 그는 누구인가?
1958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에서 당시 세탁소를 운영하던 부모님 밑에서 2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나게 됩니다.
1982년에 사법시험 제24회에 합격하게 됩니다. 추미애 국회의원의 남편인 서성환씨는 동기 변호사입니다.
이 둘은 캠퍼스 커플로 7년간 연애해서 결혼에 골인합니다. 서성환씨는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데, 당시에 영남지방에서 호남지방 사위를 보는 일은 흔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서성환씨는 다리에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이런 이유로 추미애 국회의원 집안에서는 서성환씨와의 결혼을 반대하였습니다.
훗날에 추미애 국회의원을 정계에 입문을 시킨 古 김대중 대통령은 추미애 국회의원에게 '호남 사람인 제가 대구 출신의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언론에서는 추미애를 '대구의 딸이며,호남의 며느리'로 부르기도 합니다.
1985년부터 춘천지방법원의 판사를 시작으로해서 인천지방법원 판사,전주지방법원 판사,광주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합니다.
1995년에 광주고등법원에서 판사로 재직을 하던중에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에게서 정계입문의 권유를 받앗으며 그해 8월 27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으며, 당 부대변인으로 정단 생활을 시작하게되면서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입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서울특별시 광진구 을에 출마하여서 당선이 된것이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판사 출신의 국회의원,판사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소선거구제 도입 이후에 서울 지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된 것입니다.
초선 당시인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 캠파에서 유세단장으로 활동을 할 당시에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서 선거운동을 한바 있습니다.이때만 하더라도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심하던 때입니다.
지역감정은 아마도 정치인들이 자신의 표를 얻기 위해서 만든것이 아닌가도 생각을 해봅니다. 14대 대선 당시에는 야당아던 평민당의 운동원들이 대구에서 유세를하다가 돌을 맞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추매애는 지역감정의 악령으로부터 대구를 구하는 잔다르크가 되겟다고 다짐하면서,유세단 이름을 잔다르크 유세단이로 불렀습니다.
이어서 대구에서 지역감정과 맞서서 저돌적으로 선전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이때부터 언론에서는 '추다르크'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16대 대선을 앞둔 2002년에 펼쳐진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낮을때부터 지지하엿습니다.
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이 되고 난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민주당내에서도 대선 후보 교체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을때에도 후보 교체라는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라면서 노무현 前 대통령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임해서는 노무현 후보 캠프의 국민참여운동본부의 공동본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일조하게 됩니다.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던 '희망되지' 저금통 사업을 이끌어서 선거운동을 위한 국민성금을 모아서 왜지엄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엿습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당전자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이후에 당시에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 분당사태에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하면서 노무현과는 정치적으로는 이별을하게 됩니다.
2004년 3월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때에 같은 당의원이던 추미애는 3불가론을 내세우며 탄핵에 반대합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1.탄핵 대신에 개혁으로 지지층의 동요를 막아야 합니다.
2.탄핵 찬성은 한나라당 지지층이 주도하고 잇으니 현혹되면 안 됩니다.
3.그래도 탄핵을 강행한다면 역풍을 맞아서 총선에서 참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추미에에게 '당시 당내 2인자이던 의원은 당론에 찬물을 끼얹고 잇다','혼자만 잘났냐?'등의 비난을 하엿고,결국에 민주당의 당론은 탄핵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추미애 국회의원은 '감옥에 간 분들의 표까지 긁어모아서 탄핵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범죄혐의로 수감이 된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민주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제가 기꺼이 표를 드리겠다면서 결국에는 당론에 따라서 탄핵 찬성으로 노선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는 국회에서는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개시가 됩니다.
이어서 곧 17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에서는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추미애 국회의원에게 맡기는데, 추미애 국회의원은 탄핵 반대의 압도적인 여론을 체감하고서는 민주당이 탄핵에 동참한 것에 대해서 당의 선대위원장으로서 당을 대표하여 사과하였습니다. 이어 사과의 의미로 '3보1배'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탄핵반대 여론의 역풍을 맞아서 민주당은 9석의 의석을 얻는데 그치게 되고,추미애 국회의원도 낙선하게 됩니다.
훗날 추미애 국회의원은 '저의 정치 인생 중에서 가장 큰 실수이자 과오가 탄핵에 찬성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207년 제17대 대선당시에는 정동영 후보자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 다음에해 치루어진 제18대 총선에서 당신이 되어서 국회의원으로서 복직됩니다.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의 최고의원으로 당선,그 해 실시된 제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국민통합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2015년에는 당시에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의해서 지명직으로 최고위원으로 임명됩니다.
홍콩에서 발간이되는 시사주간지인 'ASIAWEEK'에서는 '아시아 정치 지도자 20인'으로 선정되기도 햇으며, 20세기를 빛내고 21세기를 및낼 여성 정치분야 여론조사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여성 10인으로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통해 선정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국유권자연맹으로부터는 '국회의정활동 최우수상'을 비롯하여서 전국 NGO단체연대로부터는 '올해의 닮고 싶은 인물상'을 수여하기도 하엿습니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사건 당시에 드러나게된 삼성 내부 문건에 '돈을 받지 않은 정치인'으로 추미애가 적혀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