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김무성 국회의원 프로필 학력 나이 키 몸무게 고향 출생지 가족관계 결혼 이혼

안녕하세요:) 김무성 국회의원의 프로필 학력 나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김무성 국회의원은 부산광역시에서 1951년 9월 20일에 출생하게 됩니다. 2019년 나이로는 69세입니다.

김무성 국회의원의 학력사항으로는 1964년에 화랑국민학교 졸업/1967년 경남중학교 졸업/1970년 중동고등학교 졸업/1976년 한양대학교 경영학 학사를 수료합니다.

김무성 국회의원은 친일파인 아버지 김용주와 어머니 강신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인 김용주씨는 1924년 포항청년회 지육부장을 맡아서 독서회를 만들어서 노동야학을 개설해서 일본경찰에 검거<동아일보 1925년 5월 9일자)와

 

1926년 1월 포항에서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자면서 지은 '삼일상회'를 설립하게 됩니다.<매일경제 1984년 2월 26일자 신문>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자고 했던 애국적인 경력들도 있지만,태평양 전쟁이 터질 무렵에 만들어져서 일본에 군수품을 헌납하는 운동과 전시사상통일운동을 벌였었던 친일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에 소속되어서 일제의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며

일본군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운도응ㄹ하자고 주장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게 확인이 된 바는 없습니다.

김용주<일본 이름 가네다 류수>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고 하여서 그가 친일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1941년 이전에 애국.항일 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김무성 국회의원 정계진출

김영상 전 대통령을 도황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하여서 상도동계가 되었으며,민주화추진협의회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1985년,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직을 역임했으며,1986년 민주화추진협의회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엇습니다.

 

1987년,통일민주당 제13대 대선 대책본부 재정국장이 되었으며 후보단일화 실패로 인해서 당시에 통일민주당의 대선 후보이던 김영삼은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하게 됩니다.

같은해 통일민주당 총무국장,당 기획조정실 차장을 역임하였으며,1989년 국회 행정실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90년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 김영삼/김덕룡과 함께 민주자유당의 당원이 되게 됩니다. 이후에 민주자유당의 의사국장과 의원국장을 역임했습니다.

1992년,민주자유당의 김영삼 대선후보 추대대책위원회의 총괄국장을 맡게 되고,1993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습니다.

1994년 대한민국 제47대 내무부 차관을 역임,1996년에는 신한국당 소속으로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서 부산광역시 남구 을에서 당선되게 됩니다.

2005년,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과 한나라당의 사무총작을 역임합니다.

2007년,제17대 대선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서 이명박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도비니다.

그리고 2007년 11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되게 됩니다. 제18대 총선에서는 친박으로 분류되면서 공천에서 탈락하게 되자,무소속으로 출마하여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7월달에 한나라당에 복당하게 됩니다.

 

2010년 5월-20011년 5월ㄲ자ㅣ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를 지냈으며, 6월에는 대한민국 국회의 운영위원회 위원장과 국회의원 야구단 이구동성의 단장을 역임합니다.

대한민국 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정보위원회 위원을 맡으며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과 한중 의원외교협의외 회장을 역임합니다.

2012년 한나라당의 당명이 새누리당으로 바뀌게 되면서,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게 됩니다.

이 해에 치루어진 제19대 총선에서 다시 한번 공천에서 탈락하여서 출마하지 못햇지만,12월에 치루어진 제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이 되어서 새누리당의 대선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2013년 4.24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서 부산광역시 동도구에서 당선되면서 국회로의 복귀를 하게 됩니다.

2014년 7월 13일 제3차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새누리당 대표로 선출되게 됩니다.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옥새런'이라 불리는 공천 파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찬박계와 비박계간에 공천을 두고서 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친박계는 이한구를 중심으로 한 공천관리위원회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서울특별시 송파구 을,대구광역시 동구 갑,대구광역시 동구 을,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친박 후보들을 추천하였습니다.

하지만 비박계로 갈아탄 김무성 대표는 '당헌.당규를 위반한 공천장에는 도장을 찍어주지 않겠다'면서 이 5곳의 도장 날인을 거부하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서울특별시 송파구 을,대구광역시 공구 을 3곳은 무공천 지역구가 되어서 비박계 후보들이 출마,나머지 2곳은 친박계 후보들이 출마하게 됩니다.

2016년, 4월 14일에 4.13 20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이 참패한 결과를 두고서 20대 총선결과는 새누리당이 초래를 한 것이라며 새누리당 선거 참패에 모든 책임을 지고서 당대표에서 사퇴하게 됩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게 되자 2016년 11월에 박근혜에 대해서 탄핵 추신을 시사한바 있습니다.

이후에는 바른정당으로 합류를하엿지만,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의 사퇴후에는 바른정당의 진로를 놓고서 유승민 국회의원과 갈등을 빗게 됩니다.

유승민 국회의원은 자강론을 주장하는 반면에,김무성 국회의원은 자유한국당과의 보수통합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의원만찬에서는 유승민 국회의원과 키스하는 모습까지 연출하였지만, 김무성 국회의원은 유승민 비대위체제에는 여전히 반대하였습니다.

2017년 11월 김무성 국회의원은 '사회 각계각층,보수우파 국민들,보수 시민사회 단체들과 함께 보수대통합을 이루어서 좌파정권의 폭주에 대항하도록 하겟습니다'라면서 자유한국당으로의 복당에 성공합니다.


Please Enable JavaScript!
Mohon Aktifkan Javascript![ Enable JavaScrip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