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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공지영 소설가,작가의 프로필 학력 나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공지영 작가는 서울특별시에서 1963년 1월 31일에 출생하여서 2019년 나이로는 57세입니다. 종교는 천주교로 세례명은 마리아입니다.

본관은 '곡부 공씨'이며 키는 163cm이며,혈액형은 O형입니다. 학력사항으로는 서울여자중학교 졸업,중앙여자고등학교 졸업,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수료하였습니다.

공지영의 어린시절

공지영 작가의 집은 어린시절 아주 유복햇다고 합니다. 공지영의 아버지는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공지영 작가가 어린시절에 차와 기사가 있을 정도로 부자였으며,공지영의 아버지는 1970년대에 이미 주5일제를 시행하는 외국계 회사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손수 운전하는 외제 승용차에 우리 가족들을 태우고서는 나들이를 다녔어요.

제가 초등학교때부터 대학다닐때까지 매일 아침 저를 승용차로 등교시켰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지영의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성질 드러운것까지 아버지를 꼭 빼다 박았다고 해요.

예를 들어,무슨 일을 할 때에 머리 나쁜거는 절대 못참거든요.그래서인지 어릴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어요.

작가로서의 데뷔

초.중.고를 거치면서 반에서 1등도하면서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으나,대학교에 입학하게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뒤바뀌기 시작합니다.

 

공지영 작가가 대학생이던 그 시절에는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으며,대학생들은 민주화 운동을 격렬하게 하던 그 시절이엇습니다.

81학번으로 386세대의 첫 세대로 민주화의 열기가 가득했던 그 시절에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연세대학교 방송국에서 아나운도로도 활동을하다가 이후, 문학휘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기형도 시인과 성석제 소설가도 있섰습니다.

공지영 작가가 대학생이던 시절 '당시에는 학생식당에서 밥 사먹을 돈이 없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운동을하는 선배들은 곱게 자란 나에게 싫은 내색을하기도 했어요. 사실은 나도 먹고 싶은대로 먹고 싶은대로 먹으면서 자랏는데,주변의 친구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고 회상합니다.

1988년에 공지영 작가는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하게 됩니다. 공지영은 결혼후에 딸을 키우면서 교외의 작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아마도 첫번째 남편이던 위기철과의 이혼을 하지 않았었나 싶습니다. 낮에는 시간이 없어서 새벽에 글을 쓰면서도 딸이 깰까바서 스탠드에 수건을 덮어놓고서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에 쓰던것이 장편소설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쓰던 때였습니다.이후에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등어','인간에 대한 예의','봉순이 언니','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즐거운 나의 집','도가니','의자놀이','딸에게 주는 레시피'등의 대표작이 있습니다.

공지영의 첫번째 남편 위기철 가족관계

공지영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85년에 직업이 작가인 1961년생의 2살의 연상과 결혼했다가 1991년에 첫번째 이혼을하게 됩니다.

 

위기철 작가의 대표작으로는 '아홉살 인생','반갑다 논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딸 위운녕을 낳게 됩니다.

공지영 작가의 첫번째 남편인 위기철과의 이혼사유는 공지영이 1987년 부정개표 반대 시위에 참가를 했다가 구치소에 1주일간 수감이 됩니다.

이때에 경험에서 나온것이 장편소설인 '동트는 새벽'이었으며, 작가로의 등단을하게 됩니다.

공지영 작가의 전남편인 위기철과의 이혼사유는 '자신은 결혼을하면 가사분담을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민주화 운동을하고 또 좌파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랑 결혼하면 당연히 결혼생활은 평등해지는지 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직접 살아보니 그렇지 않더래요.그래서 너무 황당해서 나온것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입니다.

공지영 작가가 결혼생활중에 원했던 것은 '가사 분담 문제','남녀 차별 문제'이 두가지로 인해서 첫번째 결혼에서 이혼을하게 됩니다.

공지영의 두번째 남편 오병철

공지영 작가가 두번째로 만나서 결혼하게 된 남자는 영화감독이던 오병철입니다.

오병철씨는 1958년 생으로 공지영보다 5살 연상이었으며, 2005년에 사망합니다.

오병철씨는 공지영의 소설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영화화하게 되는데 이때 이미 미 둘은 이혼을 한 후였습니다.

이 둘은 1993년에 결혼을하였고,2년 후인 1995년에 이혼하게 됩니다.영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1995년 개봉작.이후 2005년 10월에 오병철씨는 식도암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 둘 사이에서도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두번째 남편인 오병철씨와의 이혼사유는 '폭력'이었습니다. 남편인 오병철에게 맞았지만,그때는 남편이 영화인인데다가 운동권 사람도 아니라서 제가 그냥 아 이번 결혼도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폭력이 원인이 되어서 2년만에 이혼을하게 됩니다.

공지영의 세번째 남편 이해영

공지영의 세변째 남편은 대학교수이던 1962년생 이해영씨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도 아들이 한명이 잇습니다. 이렇게 해서 공지영에게는 '성씨가 다른 3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세번째 남편인 이해영씨는 남녀평등의 이야기를 많이하고,둘째 아이도 흔쾌히 받아주어서 결혼생활이 행복할거 같았다고 합니다.하지만, 교양있는 사람이 너무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한것이 화근있었다고 합니다. 세번째 남편과의 이혼사유 역시 '폭력'이었으니 말이죠.

이렇게해서 공지영 작가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흔지 않앗던 3번의 결혼과 이혼을하게 됩니다. 세번째 전남편이던 이해영씨는 한신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공지영과 이혼후에 허수경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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